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테오도르 몸젠 (문단 편집) == 여담 == * 유약해 보이는 겉보기와 달리 한 정력했다. 부인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16명이나 낳았다... * 길을 가면서도 책을 읽을 정도로 열정적인 학자였다고 한다. * 훌륭한 역사학자의 피는 어디 안 가는지 그의 증손자인 볼프강 몸젠과 한스 몸젠도 20세기 독일 역사학계를 대표하는 거물이었다. * 저명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박사학위 논문 <중세 상사회사 서설>을 심사한 사람이 바로 몸젠이었다. 당시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려면 학위신청자가 자신의 논문에 관해 제시한 논점 3가지에 대해 다른 학자들과 신청자가 토론을 벌여야 했다. 로마사 분야의 최고권위자인 몸젠은 베버가 '식민도시'(colonia)와 '도시'(municipium)에 대해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고 주장하며 베버의 의견에 물음을 제기했으나, 얼마간의 토론 이후 >'베버의 논제가 옳다는 것에 승복하진 않지만 이 수험자의 앞날을 방해할 마음은 없다.' 고 말하며 토론을 끝마쳤고 베버의 박사학위 논문심사는 그렇게 통과되었다. 평생을 몸담은 자신의 전문연구분야에 대한 젊은 학자의 도전적인 의견을 무시하지 않고, 학자 대 학자로서 의견 교환을 한 것으로 보아 학자로서 겸허함을 갖춘 사람이었던 것 같다. * 몸젠의 《로마사》는 2013년부터 우리말로 된 번역서가 순차적으로 나오고 있다. 다만 몸젠의 《로마사》가 아직까지 정설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자. 고전으로서의 지위와는 별개로 이것도 상당히 오래된 책이다. 20세기에 사료 비판 방법론뿐 아니라 고고학이 발달하면서 고대사 해석은 몸젠의 시대와 비교하면 상전벽해로 바뀌었다. 번역 수준은 아쉽다. 비문이 많다. 개정판에서 비문 수정이 필요하다. *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교정에는 그의 석상이 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서독 분단 시절에는 훔볼트대가 동베를린 지역에 속하게 되어 그의 석상이 치워지고 이 대학 법학부 졸업생인 [[카를 마르크스]]의 흉상이 세워졌다. 그러다 동•서독 통일 이후 마르크스의 흉상 대신 몸젠이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분류:노벨문학상 수상자]][[분류:독일의 역사학자]][[분류:독일의 법조인]][[분류:독일의 고고학자]][[분류:학자 출신 정치인]][[분류:독일 제국의 정치인]][[분류:독일계 덴마크인]][[분류:1817년 출생]][[분류:1903년 사망]][[분류: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 출신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